차라리 고단함이 이유라면 쉬울 것 같다.
그러한 물리적인 까닭이라면 input을 제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바램이 있다.
그것이 명확할 수록 하나에 집중할 가능성이 커진다.
사랑이 바램이라면 누구는 기도를 하고,
누구는 헌신을 한다.
목적이 있고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사람은 무엇이든 하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그 무엇을 한다는 것은
삶을 원치 않는 언저리로 몰아가는 보이지 않는 힘을
소진시킨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문제는 스스로조차 무엇을 원하지는 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딱히 마음에 드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장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으니
굳이 방향을 정해서 자신을 이끌어 갈 이유 또한 없다.
이렇게 방향을 상실한 힘은 우리의 삶을 조금씩 밖으로 밀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우리 대부분은 방황에 대해 꽤나 부정적인 포장을 씌워 놓고
일찌감치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다.
사실 방황이라는 것은 그리 거창한 놈이 아니다.
내면에서 무언가를 열렬히 갈망하고 있지만
단순히 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단지 그 뿐이다.
그 과정이 남보기에 민망하고 또 스스로도 못마땅하다 하여
당장 마음에도 있지 않은 공부를 한다던가 덥썩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여
망각이 주는 잠깐의 달콤함에 의지하려는 행동은
내면을 직시하는 눈을 흐릴 뿐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불쾌하기 짝이 없는 답답함 앞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빨리 수면 위로 떠오르길 원하지만
사실은 더욱 깊이 더욱 아래로 가라앉아야 할 시기이다.
철저한 고독과 철저한 고립의 시기.
즉 달콤한 망각보다는 고통에 찬 성찰을 택해야 하는 이유이다.
진통제 따위는 던져버리고,
생생한 고통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우리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맞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우리가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편견이라는 것.
이러한 편견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불행함을 느끼게 된다.
타인의 웃음을 보고 그렇지 않은 자신에게 불행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전력투구하지 않는 삶이라 하여 스스로 낭비하는 인생이라 폄하한다.
건강한 나무는 몇 년에 한번은
잎도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죽은 듯 지낸다고 한다.
가끔 해걸이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그 나무를 베어버리고 새로운 나무를 심고는 하는데
이는 방황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꼭 닮은 듯 하다.
이 해걸이라는 시기가 지나게 되면
그 나무는 더욱 크고 강하게 가지를 뻗고 더욱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인내만이 가져올 수 있는 성장의 기쁨인 것이다.
앓는다는 것.
방황한다는 것.
괴롭다는 것.
불행하다는 것.
고통스럽다는 것.
삶은 원래 생겨먹은 것부터가 황폐하다. 바꿀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각자 저마다 주어진 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여
대신 짊어보려 해도 지는 시늉만 할 수 있을 뿐
순전히 스스로만이 질 수 있는 짐이다.
그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지만 또 다르게 보면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몫이기도 하다.
그래! 이것은 내 몫. 나의 몫이다. 오롯이 나의 몫이다.
방황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자신의 짐을, 자신의 몫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대하고 있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렇다.
오직 정직한 사람만이 제대로 방황하고,
오직 아름다운 사람만이 제대로 아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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