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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 Hobbes, Thomas』는 자연상태의 인간의 모습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야만적 상황에서의 개인은 자연으로 부터 부여받은 권리, 즉 자연법 상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권력을 한 곳에 양도하여 강력한 통치자를 세우고
또한 일관된 법을 만들어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대해서 만큼은 비록 상반된 견해를 가졌지만
『루소』 또한 권력양도에 의한 사회계약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주장에 의구심을 떨쳐 낼 수가 없다.
과연 국가란 만인이 자연법상의 권리를 더욱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
사회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서 탄생시킨 것일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권력의 속성

『국가권력』이란 한마디로 위에서 아래로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의 행사이다.
하지만 사회계약론자들의 주장처럼 이러한 국가권력이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란 규모의 문제이기에 먼저 여러 군소 권력들간의 합을 이루어야 하는데,
모든 권력들 간의 결합은 위에서 아래 즉, 종적인 형태가 아니라
횡에서 횡으로의 결탁으로 이루진다는 것을 통찰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권력양도란 곧 신분의 하락을 의미하고 무엇이든 복종하겠다는 서약과도 같기 때문이다.

다수의 자발적인 권력양도가 잘못된 전제라고 가정한다면
국가권력이 존재하기 전부터 어떠한 형태로나마 억압적 통치권력들은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회라고 하는 개념 안에서 국가라는 것은 사회집단으로서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최종 단계에 오기까지 수많은 군소 권력자들 간의 결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즉 국가는 자의가 아닌 강제에 의해 형성된 권력의 집합체인 것이다.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그리고 우리가 생각없이 지나치는 제도 중에 『VISA 제도』라는 것이 있다.
흔히 해외여행할 때 거쳐야 할 수속과정이라 쉽게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 VISA제도라는 것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VISA제도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혜택은 잠시 제쳐 두고서라도 말이다.

태초에 인류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발생하여 유라시아를 거쳐 세계 각지로 정착을 하였을 때
그들은 과연 VISA를 거쳤을까?
물론 초기의 인류의 상당수가 유목 형태의 경제활동을 했다는 점도 있을 것이고
당시 통치자의 강제에 의해 이동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은 단순히 그들의 이동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통제를 받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과연 지금의 VISA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흔히 일용직보다는 월급직이 안정적이며 월급직보다는 연봉직이 훨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똑같다.
국가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
바로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국가구성원들의 무분별한 이동은 곧 정부 수익의 불안정을 의미한다.
재정이란 언제나 예측가능한 울타리 안에서만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타국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구성원만 못한 것이며
차라리 이러한 변동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 간 서로 기존의 구성원들을 잡아두기 위한 합의가 필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VISA제도라는 것이 어느 힘있는 국가 하나가 나선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며
쌍방간 다자간 합의가 필요한 제도라는 점에서,
이는 위 소제목 『권력의 속성』에서 언급한 내용 중 
"권력 간의 결합이나 합의는 종과 종이 아니라 횡 間의 형태를 띌 수 밖에 없다."
고 말한 내용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VISA 수속을 밟고 있는 이유는 더욱 자명해진다.
후진국으로서는 유출인구가 많을 수 밖에 없기에 세수확보 차원에서 합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선진국의 입장에는 유입인구가 많아질 수록 사회 불안정 요소가 많아져 
기존 구성원에 대한 사회적 활동이나 경제적 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에 반드시 출입국 검열제도인 VISA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국가권력은 필요에 의해 서로가 횡적 협의를 이루고 있으며
개인은 합법적인 제도에 의해 구속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바이너리한 현대적 국가의 완성은 VISA제도가 만들어진 이 시점이라 생각한다.
VISA제도란 더 이상 이 사회는, 이 국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현대 국가의 완성은 곧 유목 경제체제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대안은 있는가?

개인이 국가를 통찰해낸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난해하고 어렵다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사유를 하는 현재의 나 또한 제도권에서 이루어진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국가적 재원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의 일부로 포함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 한번 더 파고 들어가보자..

흔히 국가라고 하면 미국, 중국, 대한민국 같은 꽤 하드웨어적인 형태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때에는 미국이나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들이대지 않는다.
병무청, 농업협동조합, 세무서 등 상당히 소트트웨어적인 형태로 개인과 접촉하게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농촌에 가서 몇 마디 물어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농협에 등록되어 있는 밭에 심게 되는 모든 종자에 대해서는 농협이 100%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단 하나의 추천품종이 전국에 일괄적으로 재배되고 있으며,
모든 유통과정 또한 농협이라는 중앙 조직에서 전담하기에
농민들에게는 그 어떠한 가격 결정권도 판로 결정권도 없다.
한마디로 법적으로는 밭을 소유하고 있되 실제로는 소작농으로서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라는 점이다.



최근 이러한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외국의 사례 중 그 실례가 스코틀랜드의 한 작은 마을의 경우다.
지금은 재단이 잉글랜드에 자리하고 있지만
1960년 대에만 하더라도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핀드혼 공동체』로 시작하여
1980년대『에코 빌리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적인 전인적 친환경적 대안사회가 될 때까지
숱한 시도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안을 마련하고 기존의 제도권에 대해 제고한다는 일은 꽤나 부담스러운 일임은 틀림없다.
극우주의자에 의해 자칫 아나키스트라는 오해를 살 소지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가는 당위성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제도 또한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각 개개인의 고통과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상 단 한번도 국가권력이 만인에게 그렇게 되어 준 적은 그 어떤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다.

가장 최선의 형태는 인디언 사회와 같은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들 또한 하나의 소규모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동일한 신체를 가진 평등한 구성원들인 동시에
스스로 자립해야만 하는 주체적 성인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그들이 신체에 가하는 극단적 고통의 성인식에 대해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라스트르』는 문명인으로서의 강인한 의지라 표현하였다.
그들은 성인식 때 겪었던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떠올리며 평생을 살아가는데,
그들 신체에 새겨진 숱한 상처들은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나는 그 어떠한 권력에 대한 욕망도, 복종에 대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약하다고 해서 비굴하게 복종하지 않으며, 강하다고 해서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회가 진정한 문명사회가 아닐까?
이에 클라스트르는 오히려 자연상태의 인간이 더욱 평화적이었으며 문명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마치며..

홉스, 로크, 루소, 클라스트르 그들이 가졌던 국가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인류학적 통찰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문을 주게 되는가?
국가란 단순히 우리를 재워주고 먹여주고 보호해주는 고마운 집단일까?
아니면 야만으로서 우리를 억압하며 복속시키는 비상식적인 제도의 표상일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개인이 국가를 통찰해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선 자연인이라면 한번 쯤은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우리가 태어나면 받는 것은 주민등록번호가 아니라 주체성이어야 한다.

우리가 건너지 못하는 저 빨간 신호등의 길 위도
한 때는 사슴과 토끼가 평화로이 뛰어놀던
아무 제약이 없었던 곳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만 여기서 이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