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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그 이전에 권위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에 대해 한 세계적인 석학이 물음표를 던졌다.
그게 지난 2010년 여름 때의 일이다.

하지만 이미 이보다 몇 년 앞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는 것은 맞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도 걱정없이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
古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밴담이나 밀 그 밖의 수 많은 정치, 철학 등에 관련된 사상가들이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는다 해도 위의 저 말만큼 정의에 대해 명확히 설명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는 쉽게 표현되는 정의임에도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맞는 것은 맞다고 하지 못하고,
틀린 것은 틀리다 하지 못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돈 주는 사람과 돈 받는 사람


친구와 등산을 하다가 문득 나온 이야기가 있다.

'유명 산악인과 현지 셰르파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왜 세상은 단 한번 그 산에 오른 산악인만 기억하고,
평생 수십 수 백번 몇 배는 무거운 짐을 지며 산을 오르내리는 셰르파들을 기억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것은 가십차원의 이야기일 뿐
실제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가령 친구와 내가 함께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을 등정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스포라이트는 내가 아닌 친구에게만 조명되고,
각종 후원은 물론 사회적인 성공까지 친구가 독차지하게 됐다고 한다면
나는 셰르파의 경우와는 다르게 뭔가 공정치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셰르파의 경우와 나의 경우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셰르파는『인간 human』이라는 주체가 아닌
하나의『자원 resource』로 봐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약속은 그 바닥의 관례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합법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한 사람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다.
값 비싼 장비를 후원할 단체를 찾아야 하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또 안내자라고 할 수 있는 현지의 셰르파들을 돈 주고 사야만 한다.

이러한 어렵고 복잡한 절차들을 거치고 나면
히말라야에 거주하는 몽치후콴씨의 이름은 그냥 셰르파가 되는 것이고,
그 옆 집의 탁카르찬씨의 이름은 셰르파2가 되는 것이다.

그 차이다.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
돈을 주고 받고의 차이.

유명 산악인이 이름 값 한다는 것은 업적을 이루었다는
영광에 속하는 일이지만
셰르파가 이름 값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름을 돈받고 팔아버린 비극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권위라는 말이 가지는 진의에 대해
그동안 한참이나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즉, 권위와 『진짜 모습 - 실력』은 동일어가 아닌 것이다.

무슨 분야 세계최고의 권위자라고 불린다고 해서
반드시 그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불명확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년에 "조선 최고의 명의는 유의태!" 라고 고백한 조선 의술 최고의 권위자 양예수의 경우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권위는 실제의 모습, 즉 실력이라는 말과 비교한다면 얼마나 더 뛰어나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홍보되고 알려졌느냐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문제를 삼는다면 질투나 시기가 작용했다고 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권위에는 대부분 그에 따른 권력이 따라오기 마련이고, 그러한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부터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권위가 부여해주는 꿈만 같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뿌리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기 때문이다.

한번 호랑이의 등에 타게 되면 절대 내릴 수 없게 되는 것처럼..

권위에 세련미를 더하다.

 



하지만 권력만으로 권위를 지키는 일은 시대가 지날 수록 버거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명분은 그들의 권력에 전혀 흠을 낼 수 없을 지 몰라도
권위에는 충분히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이론의 발전과 함께 권위를 지키는 방법에도 그 세련미가 가미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왈츠를 출 수 있는 교양인임을 과시하면서 독실한 신앙을 내세우고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는 모습을
은근히 드러내는 것은 차라리 고전적인 수법에 속한다.
자신들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성을 쌓는 것.
바로 이것이 권위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의학이나 법학만 보더라도 일반인들은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는 어려운 표현으로 가득하다.
실제 무슨 뜻인지 알고나면 그리 어려운 표현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과대포장하고자 그들 권위자들은 자신들만의 성을 쌓게 되는 것이다.
먹고 살자면 어쩔 수 없다는 말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고작 그 이유 하나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권위는 결국 강자와 약자간의 타협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정의로운 사회의 조건으로 다음 3가지를 꼽았다.

첫째, 당신은 행복한가?
둘째, 당신은 자유로운가?
셋째, 당신은 공평하다고 느끼는가?

개인 혹은 특정 조직의 권좌를 지키고자 진실을 은폐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기여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하며
자신들만의 견고한 성을 쌓고서 혜택을 독식하는 사회에서 도대체 어느 대다수의 힘 없는 사람들이
『행복』과 『자유』와 『평등』을 얻을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성공을 꿈꾸면서도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게되면 그저 그렇게 살다가기를 택한다.
남들과 똑같이 안정적인 급여를 편하게 받기를 원하고
남들과 똑같이 매달 보험료 등을 내며 아직 오지도 않은 위험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정기적으로 레스토랑에서 분위기를 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를 원하며
남들과 똑같이 문화공연을 즐김으로써 자신이 아직은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음을 재확인한다.

남들과 똑같아 지기 위해서는 절대로 위의 고리 중 어느 하나라도 끊어져서는 안되는 것이고,
그 어떤 선택도 함부로 해서는 안되며
주변사람들의 의견이나 혹은 전문가의 결정에 자신의 삶 모든 선택권을 내맡기게 된다.

이렇듯 정의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는 소수 권위자에 의해 은폐될 뿐만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삶이 아니고서는 불안해서 잠 못이루는 수 많은 약자들에 의해서도
정의는 점차 그 생명을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름을 거세당한 셰르파가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산을 오르기를 결심해봤다면?

물론 그는 산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당장의 생계부터
걱정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정의라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사회를 원하는 부류에게도
혹은 그렇지 않은 힘없는 약자들 모두에게도
참 불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딜레마를 어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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