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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혁명의 의미, 그 변화의 바람.

 

지층 속 화석은 우리가 겪지 못했던 오래 전의 상황을 짐작하도록 해준다.

예를 들면, 산 중턱에서 발견된 조개 화석은

그 곳이 이 전에는 바다였지만, 지금은 지각활동으로 인해 융기했음을 알려준다.

 

물론 이 『짐작』에는 융기라고 하는 지각활동에 대한 검증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지식을 바탕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화석발굴이나 지층탐사 활동을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하나의 연결활동이 한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흔한 소재들 또한 그 연결활동의 대상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일상들을 가지고 고고학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소재들.

그 중에서도 『음식』이라는 영역에서 도출된 사회적 모순들의 연결점을 찾고

그 문제점이 개인을 넘은 제도적인 한계에서 봉착되었다는 근거를 짚어고자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하나의 짐작이다.

짐작이 가지는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짐작이란 예측이고 나쁘게 말하면 선동인데,

둘 다 변화를 요구하는 게 목적이라면 유일한 합의점이라 하겠다.

물론 어느 쪽을 더 크게 볼 지는 여러분들 선택에 달렸다.

 

 

 

육식의 대중화

(나는 당신이 미식가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다. 

단, 당신이 먹는 음식 하나로 당신의 사회적 인식수준과 성향 그리고 미래의 모습까지도 알 수 있다.)

 

음식 안에는 세상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음식의 순환활동인 생산과 운송, 소비 3가지에는 그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경제적, 제도적 상황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 등 소비자들에게 꽤 인기가 많은 식자재들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100년 사이이다. 소와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은 식자재이기 이전에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생육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생산성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육류의 식자재로서의 대중화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예를 들어 항생제로 가축의 생존율을 높이고, 성장촉진제로 생육기간을 압축시켜

이들을 하나의 정형화된 공산품으로 개념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은 공장으로 치면 수율을 높이고, 불량율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여기에 거대자본이 더해져 그 생산규모는 급수적으로 커지게 되었고 자연히 가격은 하락하게 된 것이다.

즉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조건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문제점 또한 적지 않았다.

 

공산품화 된 가축들이 그 생체적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 영국의 광우병 파동이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자본주의적 공장체제를 버텨내기에

영혼을 가진 생명들로서는 무리였던 것이다. (자본주의를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지구상에 오직 기계 뿐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본래가 『더욱 많이, 더욱 크게』를 지향하는 사회체제라고 봤을 때

축산업 같이 유한한 자연 자원을 쥐어짜는 형태가 가지는 한계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유럽에서는 이미 수정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이 심도있게 진행 중이지만

한국에서는 체제 언급에 대한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한가지 의문인 것은 '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동일시 되고 있는가'이다.)

 

 

채식의 대중화

(채식이란 '먹는다'는 행위의 차원을 넘어선,

생애 전반에 대한 태도와 철학까지 아우르는 깊은 성찰의 적극적 행동이다.)

 

요즘 채식열풍이 불고 있다. 『Vegeterian』이라고 하는 채식주의자들은

현대사회의 육식으로 편중된 식습관이 개인의 건강에서는 물론이고 

우뮤형 자원의 보호차원에서도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무감각적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온갖 공장화가 이루어진 가축의 축사들을 보자. 

닭이나 돼지는 평생 움직일 공간도 없는 틈에서

단순히 먹고 싸기만를 반복하는데. 오직 죽음만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그 와중에 가축들은 정신착란을 일으키기도 해서

머리를 벽에 부딪혀 자해를 하고 주변의 가축들에도 해를 가하기도 하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온갖 참혹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우리가 고기를 매일같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자본에 의한 육류의 대중화가 한 몫한 부분도 있지만

사실 상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간극을 최대화 하여

 과정을 소비자가 외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덕분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젖소들이 임신 유도제를 맞아가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까지 젖을 짜내는지 알지 못하며,

형식상의 절차만 거친 도축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소들이 산 채로 고기를 내놓고 있는 지 볼 기회조차 없다.

30년령인 젖소가 사실은 8년도 못 버틸 정도로 착취당해 쥐어 짜낸 우유가 도대체 얼마나 유익할까?

 

이러한 잔인함에 대한 제도적인 외면 장치.

포장된 휴머니즘. 

그것은 생산과 소비의 완전한 분리이며 결국에는 유통의 복잡화로 이어졌다.

즉 육식을 대중화를 가느예 했던 보이지 않는 핵심 요소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무감각, 무책임한 식탐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채식의 등장이다.

 

채식의 어원은 『Vegetable-채소』로 알고 있지만 실은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Vegetus-건강한, 올바른』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대 자본이라고 하는 이 주체는 

돈이 될 만한 것이 대중화가 될 낌새가 있다면 가만히 손놓고 보지 않는다.

일찌감치 잠재시장을 분석하고 생산성을 극대화하며 동시에 손실을 최소화하여

대중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적정 가격을 제시하는 패턴은

이제 우리 시대에서는 익숙하게 느껴질 만한고전이 되어버렸다.

 

단 기술 발달 수준에 따른 방법만이 바뀔 뿐이다.

예전에는 작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재래적인 방법인 농약살포라던지 이종교배에 자본을 투입했지만

최근에는 생명공학이 주를 이루는 유전자조작-GMO에 주목을 하고 있다.

 

농약을 치지 않아도 병충해를 견디는 작물, 비료를 주지 않아도 몇 배의 수확량을 보장하는 작물.

미래에 닥칠 식량자원 고갈에 대한 강력한 대안으로도 환영받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순수 과학자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다국적 기업에게는 육류 시장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새로운 돈벌이 기회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전적 질환은 그 발현이 더디게 나타남은 물론이고 한번 나타나게 되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더구나 다음 세대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기에 GMO문제는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개체와는 달리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자 조합은

태생적으로 그 안정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다운증후군이나 터너증후군 같이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유전질환은

GMO작물에 대한 저항체계에 의심을 할 필요가 있다는 명백한 근거이다.

 

그리고 위에서 정의한 대로라면 이러한 방식의 채식은 살이 아닌 풀을 뜯어먹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육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Vegetus 즉, 올바른 식문화야 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부분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생산되고 유통되었다면 그것은 비록 육식라 할 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채식이다.

자연을 쥐어짜지 않고, 생명을 경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자고 일어나면 밤새 새 살이 돋아나 있을 것만 같은 숱한 고깃 살들과

마트에 가면 언제나 배치되어 끝도 없어 솟아나는 작물들을 보며

세상이 안겨주는 안락함, 풍요로움에 젖어 변화는 불필요한 것이라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음식의 잉여화

(지금은 모든 것이 재화를 닮아간다. 문화와 교육, 음식, 법, 음식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람까지도.

수 많은 토익점수들 스펙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도구이고 데리고 있을 만한 사유재산인지 PR한다는 증거다. 본연의 목적을 상실한 것은 존재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 인간농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옛날에 모두 죽었다.

용감한 사자와 지혜로운 돌고래와 함께.)

 

이제는 음식은 화폐를 닮아가고 있다.

숱한 방부제와 식품 첨가제이 든 음식 썩지 않는 재화처럼 잉여화가 가능해졌으며,

심지어 국가 간 유리한 협상을 이끌기 위한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지금의 시대가 자본주의 시대고,

세상 모든 가치가 재화로 매겨지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가치는 제도라는 방벽 따위를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이다.

 

식탁이라는 성스러운 곳은 

인간이 태어나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배우게 되는 최초의 장이다.

강산이 바뀌고 세상이 엎어져도 이곳 식탁에서 느낄 수 있는 인류 공통의 원초적 행복은

그 어떤 대상도,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작은 음식 하나에 담긴 세상의 모든 것.

생명에 대한 무감각은 현대 사회의 인식 수준을 말해주고,

거대자본의 무절제함은 공공성을 상실한 사회적 한계를 보여준다.

그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채식문화마저 자본화되는 있는 요즘,

우리는 앞으로 무슨 생각과 계획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까?

 

작은 움직임, 공동체 문화의 시작.

 

변화가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다국적 기업이 제시하는 연구결과에 의탁한 채 살아가면 그만이다.

단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느낀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소규모 공동체에 기반한 생산체제와 문화에 대해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도시거주자이거나 직장인이라고 해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요즘 대두되는 3km운동이나 10km운동은

내 주변에서 생산되는 올바른 작물로만 끼니를 떼우자는 운동이다.

생산에 드는 비용보다 운송에 드는 비용이 훨씬 많은 요즘 『푸드마일(음식의 운송거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기에 

더 이상 생산지와 소비지의 구분은 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그리고 종자선택, 재배방법, 판매까지 농민들을 대상으로 생산과 판매 전권을 행사했던

기존 농업관련 조합의 구속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 또한 일고 있다.

사실 지금의 농업 구조는 농협 이하 소작농의 형태이다. 농민들은 전답만 소유할 뿐

결정권의 상당부분을 농협이 가지기에 소작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최근 젊은 귀촌인구를 중심으로 한 각각의 마을 공동체가 결성되어

재배부터 시작해 유통, 판매, 마케팅까지 생산과 유통 판매까지의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가져가고 있으며

이는 뜻 있는 소비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거대 자본이 기획하고, 움직이는 시대는 한때 풍요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곳곳에 생채기를 내고 상식과 가치 앞에서 생떼를 부리고 있다.

GMO표기와 육류수입협상 문제 등 소비자가 원하는 방향과 정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이 상황을 볼 때, 변화는 더욱 빨리 더욱 거세게 일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외쳤던『더 많이, 더 크게』는 이제 『더 행복하게』로 바뀌어야 한다.

 

음식에 담긴 작은 변화의 움직임.

그것은 식탁의 변화가 아닌 세상의 변화이다.

어쩌면 식탁에서 시작된 혁명이 세상을 바꿀 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상은 좀 더 행복한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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