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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그 자체가 바로 혁명 - 설국열차

 

 

얼마 전에 영화 『설국열차』를 봤습니다.

차에 지갑을 놓고 내리는 바람에

영화 초반 10분 정도는 놓쳤네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며,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더군요.

완전 실망했다 vs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꿈보다 해몽도 경계를 해야겠고,

무엇보다 인신공격은 반칙이겠죠.

 

사실 이런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계급을 지양하는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요즘,

제도의 허상을 폭로하는 작품들은 꾸준히 나왔었습니다.

 

원래 영화 『설국열차』의 원작은 프랑스의 어떤 만화입니다.

이 작품은 1970년에 구상을 시작해서 70년대 말에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휴..

암튼 ㅎㅎ

프랑스인들의 높은 사회인식 수준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2007년 여름이었나.. 몇 해전, 프랑스를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발코니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며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더군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어땠을까? 

거실로 밀어버렸겠죠.

 

모든 열린 공간은 곧 미완성이 되어버리고, 불완전한 단계로 인식되는 사회.

『소유』의 경계로 모든 것이 폐쇄되는 세상.

 

흠.. 자아비판을 하니 기분이 시무룩해지네요.

왜냐하면 저도 나중에 집 하나 마련하면 발코니 밀어버리고 싶거든요.ㅎㅎ

암튼 이럴려고 설국열차 글 쓴 건 아닌데.. ㅎㅎ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영화는 아시다시피 상당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정치를 이야기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 왜냐하면 사실 저는 정치란 전설에서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정치가 어딨습니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였나..?

중국 삼황오제 때였나.. 요순 때였나.. 

산과 물을 정비하여 소작농들에게 농지를 무료로 분양해줬다는

자본주의 원칙에 반하는 사회주의 반동분자같은 이야기는 책으로 얼핏 본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도 나일강이 매년 범람했기 때문에 

농지의 구획을 다시 정해야하는 원시적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아예 수학을 창시해버렸다는 덕후같은 이집트 공무원의 일화 또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동화로 들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옛날에 정치라는 것은 행정을 위해 존재했었습니다.

근데 요즘 중학생 사회 교과서를 보면 정당의 목적은 정권찬탈이라 나와있죠?

정권찬탈말고 좀 순화된 표현없을까요.. 당장 생각나는 단어가 이것 밖에 없군요.

 

아무튼 제가 태어난 이후에 제 눈으로 봐온 그 정치라는 것은

하수도는 기본이고 상수도나 철도, 공항을 끼리끼리 매각해서 재테...

아 이럴려고 이 글을 쓴 게 아닌데 ㅎㅎ

갑자기 대동강 물로 재테크한 봉이 김선달이 생각나서요..

제가 예의는 발라도 이렇게 경우가 없다니까요 ㅎㅎ

죄송합니다. 암튼 자중하겠습니다.

 

 

다시 설국열차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번 질문을 던져 보십시다.

 

만일 내가 더 이상 보험금을 따박따박 낼 수 없게 된다면?

만일 내가 더 이상 정규교육의 굴레에 속할 수 없게 된다면?

만일 내게 더 이상 오페라 하우스를 갈 여력이 없게 된다면?

 

만일 저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뭐 낙오자 되는 거죠.

낙오라는 것은 일정한 대열에 소속되지 못하고 이탈된 상황을 말하는데,

일정한 대열.

그 일정한 대열은 바로 사회가 제시하는 『올바른 길』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지금 저를 포함한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분들 모두

그 대열에서 나름 선두에 서신 분들이고 올바른 길을 걷고 계신 모범 계층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 나오고

모두가 부러워 내로라하는 직장에서 다른 걱정없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업무환경에..

빛나는 명함에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패턴에서 하차하실 용기 있으신가요?

 

영화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는 등장 초장부터 심상치 않더니

결국 영화 말미에서 주인공 커티스에게 하차 하자고 합니다.

물론 마약에 쩔어서 내지른 자살충동 때문이 아니라,

7년에 가까운 관찰을 통해 알게 된

눈이 녹고 있다는 『진실』을 근거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기차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꼬리칸에는 창문이 없었고,

머리칸의 사람들에게 빙하기는 곧 권력의 근거였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진실을 알 『기회』가 없었던 것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진실을 알 『필요』가 없었던 거죠.

 

이 땅에 존재했던 세상의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설국열차의 커티스가 꼬리칸의 사람들을 이끌며 혁명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 혁명 또한 실패로 귀결됩니다.

논리의 부재, 철학의 부재 때문이지요.

『혁명이 진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은 언제나 혁명적』이기에

진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혁명들 또한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혁명가 커티스는 시스템을 장악하면 기차 안의 모든 것을 혁명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죠.

그래서 그는 무시무시한 공권력과 맞서고,

주요시설을 장악해가며 시스템의 근간인 엔진에 한발한발 다가갑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단 한가지, 『기차 밖』입니다.

바로 진실이죠.

 

 

실패한 모든 혁명은 결국 권력의 다툼으로 귀결됩니다.

야심차게 시작했으나 결국 시스템의 주인이 되기 위한 다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됩니다.

프랑스의 혁명이나 3일천하나 결국 자리 싸움입니다.

부르주아나 개혁파나 물에 희석되듯 그렇게 섞여갔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글을 통해 굳이 정치를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위에서 말했든, 저는 중국과 이집트 구전동화 이후로 제대로 된 정치라는 걸 들어본적도 맛본 적도 없을 뿐더러

정치라는 카테고리는 사실 우리가 사는 인간세상에 비하면 그들만의 잔치.

즉 micro 마이크로 작은 세상입니다.

 

저는 다소 원론적으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가진 본연의 자리.

『존재』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다시말해 윌포드가 말한 닫힌 생태에서의 『자기역할론』

사회 구성원의 부품화.

그 냉소에 대적할만한 논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역할론

 

 

2500여년전 공자와 맹자는 정명사상을 주창했습니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저는 고딩 때 도덕책에서 정명사상을 처음 보고

우와 이렇게만 되면 세상 참 아름다워지겠구나 한 적이 있습니다.

왕이 왕다우니 세상 모든 것이 그를 본받을 것이고,

신하가 신하다우니 세상의 간악함은 발디딜 곳이 없을 것이며

백성이 백성다우니 세상 천지에 근심걱정이 어디 있을까 하며 말이죠.

 

개소리입니다.

그 정명의 사상은

니 자리나 조용히 지키고 있으라는 윌포드의 사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한 정명의 사상은

왕을 위한 학문입니다.

왕도를 위해 평생을 고민한 사람이 공자입니다.

 

중국의 휴머니스트 공자는 왕을 신의 아들이 아닌 한낱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기에 도구가 될 수 없다고 하지요. 참 인간적입니다.

다만, 그는 만인지상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인간으라 부르지 않습니다.

도구라고 부릅니다.

능력이 출중한 자를 인재라고 불러 재목이라 여겼습니다.

즉, 인간 본연의 존재적 가치보다

인간의 역할론에 가치를 부여한 사람이 바로 공자죠.

 

그러한 공자의 사상과 학문을 백성들은 외우고 다녔습니다.

마치 스쿨존에서 엔진을 찬양하는 아이들처럼 말이죠.

저는 이러한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반쯤 미치거나, 혹은 바보가 되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타협을 세상사람들은 『지혜』라고 부르죠.

 

가끔 선거철 마다 정치인들 인터뷰 릴레이를 하는데,

'주량이 소주 1병'이다, '나의 단점은 정이 많은 것이다'는 답변들은 

이미 레파토리 중에서도 고전입니다.

 

가관인 것은 가장 감명깊게 봤단던 책이

하나같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고들 합니다.

공자왈하는 백성에 군주론 찬양하는 목자이니

쌍방간 수준이 맞기에 그닥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이 목자분들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는 한 번에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군주론이 어떤 책일까요?

군주에게 더 교활해지고, 더 간사해질 것이며, 더 잔인해질 것을 주문하는 책입니다.

심지어 마키아벨리가 당시 군주들을 조롱하기 위해 썼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을 탐독하고 표지가 닳도록 봤다면서

선거마다 표를 달라니 참.. ㅎㅎ

둘 중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책을 안봤거나 혹은 평소에 보좌관들한테 함부로 대했거나 ㅎㅎ

 

종교

 

 

암튼 공자의 저런 모습은 길리엄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길리엄은 자신의 희생으로 무질서한 꼬리칸의 질서를 바로 잡은 인물입니다.

종교 지도자에 가까운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사회보다는 개인에 집중합니다.

개인의 인내와 희생, 개인적 차원의 변화로써 구원을 찾고 질서를 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가 가진 힘인 동시에 한계죠.

새상의 부조리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기에 사회 변화를 추구해야 함이 응당함에도

짐승 소굴 같은 곳에서 서로의 팔다리를 내어주면서

그렇게 평화를 유지하고 질서를 찾게 되죠.

꼬리칸 사람들은 이 비극을 오히려 기적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가혹하게도

무임승차라고 하는 씻을 수 없는 그『원죄』는 대를 이어서 자식들에게도 전해집니다.

 

사이즈에 맞춰 부품화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가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배식되는 연양갱은 가축이 먹는 사료와 다르지 않고,

무참히 집행되는 신체절단형은 도살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경쟁

 

 

사회 시스템은 수 많은 사회적 가축을 양산해냅니다.

능력이 있는 가축에게는 총리 자리라는 보상을 주고,

무임승차를 한 불가촉 천민에게는 착취만이 있을 뿐이죠.

 

여기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코드는 『경쟁』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경쟁을 이겨내고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경쟁사회에서 기회란 세상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뻐드렁니의 메이슨 총리는 그 경쟁의 정점에 선 인물입니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국가라는 시스템이 생기기 이전에도 있어 왔고, 이 후에도 우리는 경쟁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꼬리칸의 사람들에게는 그 살벌한 경쟁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죠.

자유롭지 않을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회의 소외계층들은 아이들마저 빼앗긴 다음에야 알게 됩니다.

 

'나만 변해서는 되는 게 아니구나.'

 

사실 소외계층들에게서 저런 공감대를 형성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의 정치란, 농지 무료분양이나 수학 창시 같은 행정 역량에 촛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교활해지고, 더 세련되어지는 처세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죠.

화려한 가면을 쓰고, 왈츠를 추며 종교를 가지는 것은 그 세계에서는 이미 고전입니다.

간단한 말장난이나 몇몇 성공신화 스토리 만들어내면

대부분의 소외계층들은 금새 와해되거나 분열되기 쉽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해도 레퍼런스가 욕설이라 지적당하고 매장당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수준입니다.

 

강남에 땅 한평없는 서민들이 부자증세에 결사반대하는 것만 봐도

혁명은 그 자체로써 이미 혁명이라고 밖에 볼 수 없지요.

그렇기에 꼬리칸의 혁명에 대해서는

메이슨의 내정역량이 형편 없었다거나 혹은 커티스의 리더쉽이 뛰어났다거나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권력의 속성

 

 

하지만 그런 젊은 혁명가 커티스의 뜨거운 심장조차 윌포드의 논리 앞에서 금새 식어버립니다.

 

계급사회에서의 부조리에 촛점을 맞추는 것은 종적인 사회인식입니다.

이는 비교적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한 종적인 사회인식에만 열정을 쏟은 나머지

횡의 개념으로 기차 안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철학적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금새 윌포드의 논리에 포섭됩니다.

꼬리칸의 지도자인 커티스와 절대권력 윌포드가

지도자로써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네요.

 

이것은 쉽게 말해『권력 간의 결탁』입니다.

 

종교 지도자 길리엄이 이미 굴복했고, 커티스 마저 권력 앞에 굴복하고 말죠.

길리엄은 그나마 작은 희망을 보았던지

마음을 바꾸고, 커티스에게 윌포드의 혀를 잘라버릴 것을 말합니다.

 

권력 간의 결탁.

애초 『국가』라는 바운더리가 생겨나기 이전,

사회 공동체가 하나 둘 통합되어가면서 겪어온 사실들입니다.

권력은 대립하지 않고, 결탁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게 세상의 순리입니다.

유럽의 사회계약론자들은 국가의 탄생을 『사회구성원들의 평화적 약속』에 바탕한다고 봤지만

저는 권력들간의 『물 밑 결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두 다 단순히 비난할 것은 아닙니다.

권력 간의 횡적인 결탁의 가장 좋은 사례가 『VISA 제도』죠.

비자는 여름 휴가 때마다 해야하는 귀찮은 통과의례 따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니 국민 세금은 니가 갖고, 내 국민 세금은 내가 갖는다'는 것입니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로 이민가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인구는 살기좋은 한 곳으로 몰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VISA 제도』가 있게 되면

후진국은 후진국대로 세수가 안정되어서 좋고,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사회 불안요소가 유입되지 않아 좋지요.

 

다만 태초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모험을 걸었던 

위대했던 인류 대이동의 기적이

이제는 VISA제도로 인해 절대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유감일 뿐이죠.ㅎㅎ

별 수 있나요? 파란 불 켜지면 횡단보도나 건너야죠.

 

암튼 영화 말미에서 윌포드의 기차는 산사태에 전복됩니다.

영원한 엔진도 철길로 상징되는 운명 위에서 한조각 쇳덩이일 뿐이죠.

벗어나면 큰 일 날 것만 같았던 위험천만한 야생의 세상.

영화에서는 북극곰이 우리를 맞이 하지만,

현실에서 지혜로운 돌고래와 용감한 사자는 이미 세상에 씨가 마르고 없습니다.

야생은 어디에 속하지 않은 그 자체이고,

그것은 곧 자연이며

자연은 소유하기 이전의 대상

즉 『Before』의 세상이고,

가축들에게는 위험함 혹은 불편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안락함에 젖은 가축들은 야생의 세계를 두려워합니다.

저는 그래서 글의 시작에서 물었습니다.

매달 따박따박내던 보험료를 내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어떨지.

 

마치 호랑이의 등 위를 탄 형국같았기에

내릴 수도 멈출 수도 없었던 기차.

그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입니다.

 

아프리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해가 뜨면 사자와 얼룩말은 달린다.

당신이 사자인지 얼룩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가 뜨면 당신은 무조건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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