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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털, 닭, 콩 그리고 자본주의




유목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농업이나 축산업 제조업등 과는 다르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구상 유일한 경제활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현실을 외면한 이론적인 말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중국의 국경을 수 없이 넘보았다는 기록은 유목이 완전한 자급자족을 할 수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 곧 틀렸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니 완벽에 가깝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의 가치를 눈여겨 봐야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나는 실제로 작년 여름에 몽골에 다녀간 적이 있다.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막과 척박한 초원은 기본적으로 부족한 강수량에 그 지긋한 적을 두고 있다.

계절에 따라 풀이 돋아나는 곳도 다르니 자연히 그 곳의 사람들은 거주지를 계절마다 가축을 끌고서 정해진 곳을 옮겨다니는 생활방식인 유목을 택하게 된 것이다.

 

유목민들은 가축의 가죽부터 고기까지 뭐하나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가축의 배변까지도 난방연료로 사용한다.

현대의 시각으로 봤을 때 그들에게서 생활 쓰레기가 전혀 배출되지 않는 것은

극한으로 척박한 환경 덕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그들은 실제로도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지극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강에서 몸을 담그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가 생겨나게 된 것은

자연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원동력이고 삶의 터전이라는 깊은 인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전통적으로 자연과의 균형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그들의 생활방식마저

최근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90년대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인한 대량생산체제가 시동이 걸리기 시작하면서

유목의 절대 불물율이 깨졌기 때문이다.


바로 염소와 양의 비율이다.

생물적 습성상 양은 풀의 약한 잎을 즐겨 먹는다. 그래서 양이 지나간 자리는 내년 봄에도 다시 파릇파릇한 잎이 돋아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게 된 염소는 뿌리까지 씹어먹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염소가 지나간 곳은 시간이 지나도 풀이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


이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유목민들은 이미 수 백 아니 수 천년 전부터 염소와 양의 2 : 8 이라고 하는

황금의 비율을 정하여 이를 대대손손 지켜가며 지혜롭게 살아왔다.

그 지혜는 인간이 혹독한 자연에게서 얻은 경험에 비롯한 생존과 공존의 지혜였다.


하지만 돈이 최우선 가치인 자본주의는 이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부드러움이 특징인 몽골산 염소 털 『캐쉬미어』가 다른 선진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캐쉬미어』의 상품가치가 올라가게 되었고,

잉여생산이라는 하는 개념이 몽골의 유목민들이게 퍼기지 시작한 것이다.

자급자족의 유목에서 돈을 남기려는 이윤의 산업의 유목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불필요한 잉여의 생산물이 곧 인간의 이득으로 이어지는 경제방식은

자연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단지 몽골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의 축산자본은 이를 정석화하여 모든 축산업자들에게 그러한 방식을 기본으로 채택하여 권하고 있다. 효율이 극대화가 곧 이윤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닭을 생산하는 공장의 한 일례를 살펴보자.

 

모든 생물은 저마다의 성장기간이 있지만 막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닭의 성장기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성장촉진 호르몬제를 투여하여 수급을 맞추는 것이다.

공장으로 치자면 개발 및 생산기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택이다.

그리고 항생제라고 하는 극단의 처방을 조치함으로써, 수율 및 불량률 최소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선진의 축산은 이미 음식으로써가 아닌 상품으로서의 대량생산체제의 틀을 완성해가고 있다.

심지어 며 칠전 C일보의 기사에는 유기농과 일반 계란의 영양학적 차이가 없다는 기사를 게재한 사실이 있다.
<관련기사>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9/2011090901539.html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유기농은 영양비의 문제가 아닌 자연이나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적게 첨가되느냐의 문제이다.

그런 사고 방식이라면 라면은 완전식품이라는 모 회사의 광고는 어찌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이는 축산의 문제만이 아니다.

농업은 이미 그 수준이 첨단에 이르렀다.

유전자 변형으로 인한 콩과 밀의 대량생산은 그 원가를 떨어뜨려 생산성을 확대하여 

불투명한 인류의 미래에 큰 희망을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해로움이 제대로 검증된 것도 아니다.

유전자 관련 부작용은 몇 대에 걸쳐서 발현하게 되는데,

한 세대를 30년이라 가정했을 때 몇 대라고 하면 짦게는 100년 길게는 수 백년이 된다.

사정이 이러한 데, 몇 년간의 동물 실험으로 임상에서 부작용이 없다고 말하는것은

인간이 돈벌이에 있어서 얼마나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변형의 대안을 내놓으라고?

대안이 없다면 이대로 좋다는 주장이 더욱 무책임하다.

그리고 살펴보면 모든 인스턴트 음식에는 이러한 유전자 변형 식품이 첨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손놓고 가만히 있는 게 옳은 일일까?

 
그리고 유럽의 까다로운 기관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하기는 하겠지만

이 곳 '좋은 게 좋다'는 한국의 식품검증 절차는 유전자 변형에 관해서는 아주 관대한 편이라

몇% 미만의 첨가는 아예 포장표기에서 면제해주는 특권까지 부여해 준다.

 

이것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가지다.

자본주의는 이대로 좋은 것일까?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제대로 된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은 지금

현실긍정과 성과창출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세 악마의 금서를 읽은 만큼이나 부정되어야 할 말로 인식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대로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소유에 대한 무분별한 허용은

이러한 잉여의 생산을 무차별하게 부채질하고 있는 꼴이 되고,

이것의 부담은 고스란히 누군가에게 혹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가 지게되는 구조라는 점이다.

 

생태의 균형은 아주 복잡미묘하다.

생태를 문장으로 풀어 쓰자면 바로 이것이다.

"주면서 받고 받으면서 주는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나라들 사이에서 캐쉬미어의 인기는
곧 생산국인 몽골 초원지대의 사막화와 직결된다.

그 사막화는 주변의 소비담당 국가들의 환경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은 다시 비용으로 돌아가고
그 비용을 충당하고자 더욱 산업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 또 성장촉진제, 항생제, 각종 농약 등의 무분별한 사용을 부추긴다.

야밤에 먹는 치킨이 소박함과 행복이라 생각하는 소비자들은

자신이 지금 어떠한 현상을 부채질 하는지 직시해야 한다.

6개월만에 성체로 자란 괴물 닭을 먹는 우리들 몸이 배겨낼 수 있을까?

그러한 괴물들의 생사 사이클을 흙은 어떻게 수용하고 분해하고 있을까? 

 

모든 사료에 항상제를 첨가하는 돼지, 소, 닭, 오리, 양식장어 따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지구 상에 몇이나 될까?


몇 대에 걸친 임상연구조차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유전자 변형 식품으로 인해

몇 대가 지나도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면

그때는 그것을 단순한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고 끝낼 수 있는 것인가?

 

잉여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가

만족을 모르는 인간과 만났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파국을 맞게 될 것일까?

이 글을 쓰는 나를 비롯하여 "나는 절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착하게 살아 왔다"는

치킨 신봉자가 절대다수인 이 곳 사회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외로운 호밀 밭 워치 독의 역할은 그저
비생산적이고 삐딱한 반항아라는 영역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착한 소비, 공정 무역, 공정 여행..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겠더라도 전체의 균형을 생각하겠다는 작은 생각과 실천들이

무차별적인 자본주의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품어본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주변으로 부터 이윤을 끌어모으는 이기적인 성공이 아니라

주변에서 독립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타적 개인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급자족의 생활방식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있어 완벽한 경제활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품이 아닌 음식을 만드는 정직한 사람과

컨텐츠가 아닌 아름다움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사회에서 그리고 저마다의 무대에서

활짝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인류의 큰 성공이 아닐까.

 

작년 여름날의 나는 몽골의 유목민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품을 수 있었다.